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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산책

어머니와 쇳덩이

by 테뉴스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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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늦잠 자려 했지만 전화 벨소리가 가만두지 않았다.  받지 않으려  했지만 손이 수화기를 먼저 들어 버렸다. 서울에서 작은 형수의 다급한 전화였다. 작은 형이  몇년 동안 중국에서 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래만의 형수의 전화만으로 짐작이 되었다.  이미 재수없이 단정해버렸다. 마침 그날은 몇일  차사고로 바디샵에 차를 맡기려고 휴가를  날이었다. 잠깐 햇갈렸다.  와중에 차수리를 생각해낸게 이기적이었다.

빨리 비행기  끊어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아내가 말했다.

그렇지?” 정신없이 뒤물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 핸드폰의 진동이  몸으로 퍼져 나를 놀라게 했다. 형수의 목소리가 아니길 바랬지만 아까보다는 차분한 목소리의 형수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재혼이 문제였다. 재가하기 전에 이미 다섯 자식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 자식들은 그에 대한 말을 꺼내는   내가 아는  금기였다.  형수들이 이해를 못하는 것은 납득이 되었다.  이해를 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떤때는 정말 노골적이었다.  30세에 남편도 없이 어떻게 다섯  애들을 먹여 살린다 말인가? 어머니도 미안한 마음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아들의 결혼전에 효자소리 듣던 것에 비한 소홀함을 모두 형수들 탓으로 돌린듯 했다.  

5살쯤일거다.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심하게 하고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버스에 올라  탔다.   힘으로 말릴힘도 없었고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단아한 색의 보따리는 어머니의 하얀 얼굴과 비슷하여 어머니와 함께 가는 그게 부러웠다. 벌써 버스는  마음을 기다려 주지 않고 내얼굴에 먼지를 내뿜고 달아나 버렸다.  뿌연 먼지들이 연기와 섞여 나의 가슴 한켠을 뚫고 통과하여 아려왔다. 버스 뒤를 한참 바라보며 기다렸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먼지가 난쪽을   몇일을 기다렸을까?

오늘은 왠지 아무 느낌도 없고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와 추억을 빨리 더듬어야 하는 조바심이 나를 압박한다. 머리속이 여러 색이었으면 구별이  쉽게 찾았을텐데 이리 저리 헤매고 휘저은 후에야  겨우 하나.

그래, 이때쯤이면  모내기철이지!.

우리는 논이나 밭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품앗이가 아니어서  이때가 어머니가 돈을 버는 때이기도 하다. 나에게도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의 보따리에 있는 오직 호빵만이 관심이었다. 안에 팥도 없었고 가끔 논물도 묻 있었지만  그렇게  맛 이었는지 여태  맛을 다시 찾지 못했다. 흙과 논물이 묻은 보따리에는 어머니의 힘든 삶이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호빵도 하나 함께 있었다. 나중에 안거지만 어머니는 새참으로 나오는 호빵을   한개를 작업복과 함게 보따리에  오셨다.

어미모

어머니의 생각들이 서울로 나를 데려다 주었다. 달리는 공항버스의  창문틈으로 참지 못한 공기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다. 세포속 깊히 파고들어 각각 제자리에 안착했다.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공기들이 퀘퀘한 냄새를 내면서 어머니와 만남을 막아서고 있다. 장례식을 치르면서 너무나 담담함에 내가 놀랐다마른 나의 감정이 들킬까봐 오히려 숨겨야만 했다.

화장이  끝났다고 마지막으로 한번 보여주는 시간이다가운데 뭔가 안의 불빛에 반짝이는 쇳덩이가  우리의 눈에 들어왔다. 일하는 사람이 작업하고   치우지 못한 걸까?

 저게  뭐야?”  

여기 저기서 웅성거렸다.

그런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빨리 기억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얼마간의 재와 쇳덩이 하나 덩그러니 남기고 그렇게 우리 눈에 사라졌다.  몸에 무거운 쇳덩이를 하나 가지고 사셨던 것이다. 자식들은  그렇게 많이 나아가지고 감당하지도 못한 쇳덩이를 키웠을까? 이내 그것은 어머니 몸의 일부였다는 것을 알았다. 몇년전에 무릎 수술을 했던 기억이 났다. 잘못하면 걷을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수술했던 쇠붙이였다. 그게 내눈엔 쇳덩이로 느껴졌다. 그동안 쇳덩이와 함께 삶이 얼마 힘드셨을까?  그래서 이렇게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5살때 늦꼈던 공허감이 몰려오면서 눈물이 갑자기 주르르 흘렀다. 멈출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한동안 허한 마음이 오래갈것 같다.

나에게는 형과 누나들과 달리 두 여동생이  있다. 오래 함께 웃고 울어서인지 안쓰럽다.

미국에 사는 나는  동생한테  미안했다. 넉넉하지 않지만 시집간 동생집에 어머니가 가끔 하룻밤씩 자고 왔다고 들었을때는 고마웠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남겨둔 재산을  동생들에게 돌아가게  한것이 무거은 마음을 조금은 털어버리고 미국행 비행기에 가볍게 오를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외국에 살고 있어서 마지막까지  외로웠는지도 모르겠다. 유달리 막내아들과 나중에 늙으면 같이 살고 싶다던 어머니였는데 같은 하늘도 아니고 자주 만날수 없는 미국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료 한번도 초대하지 못했다. 여권까지 만들었는데 끝내 성사 되지않아  마음이 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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